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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훈대부 평택현감 이공 형수 묘비명(通訓大夫 平澤縣監 李公 亨樹 墓碣銘)
(번역문)
공은 신평이씨로 고려문하시랑 시호 문간 휘 덕명이 그 시조이다 이조에 와서 이조판서 휘 상원이 고조요 홍문관 부제학 휘 가종이 증조요 문과정랑 휘 귀통이 조요 장락원주부 지화가 공의 아버님이시다.
어머님은 풍천임씨로 성종 서기 1471년에 홍주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남보다 빨리 깨닫고 배우지 안했어도 어찌해야 군자의 길을 행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한헌당 김굉필의 문하로 들어가 수학을 하였다. 수년을 성리학에 몰두하여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남보다 앞서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게 되었다.
산에 들어가 책을 읽고 수양하며 후학을 위하여 힘을 쓰고 법도에 따라 행동을 하고 온화하고 공손하게 남을 얕보지 않고 존경하며 자기를 낮추어 모든 이에게 호감을 주고 사람을 가려 윗사람을 공손히 모시고 겸손하게 대하니 원근사림에서 우러러 칭송하고 숭상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선영봉사에 성의를 다하였으며 종친에게는 정성과 예를 다하였고 종족이나 친구간에는 서로 화목하고 친절하게 신의를 지켰으며 아버지상을 당하여 산소에서 여막을 짓고 시묘를 하면서 애통해함이 처절하였다.
복궐후 1534년 가정 13년 갑오년에 전라병마절제도위로 부임했고 다음해 평택현감을 제수받았다. 삼년동안 공정하고 진실하게 법을 집행하고 백성들을 기쁜 마음으로 다스리며 세금을 감면해주고 균등하게 다스리며 티끌만큼도 욕심을 부리지 않고 시행하니 공의 과단성에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인조 정미년 1547년에 향년77세로 돌아가시다. 묘는 옥구읍 한림동 해좌이고 부인은 숙부인 제주 고씨로 여자의 도리를 다하여 시부모님 음식을 준비함에 있어 먼저 감식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안했고 여자의 도리에 엄하였고 친족간에 화목하게 하고 가까이하여 가정이 늘 편안하였다. 2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휘 인복은 일찍 돌아가셨고 차남 휘 의복은 통훈대부 무안현감을 지냈으며 1녀는 청주인 승지 한덕삼의 처로 2녀는 담양인 전승규 처로 3녀는 두능인 두헌처로 4녀는 문과판윤 경주인 오진흥의 처다. 손자 휘 춘성은 문과에 급제 경상도사 이조정랑을 지내셨고 춘림은 무과선전관으로 을묘 2월7일에 돌아 가셨다
공의 묘는 옥구선산에 곤좌로 합장하였다. 비와 묘비명이 있었는데 난을 당하여 지방에 사는 고장사라고 별명을 가진 사람이 완력으로 비를 뽑아다가 산 아래에 있는 저수지에 빠트려 버렸다 그 후 기묘 1939년에 큰 가뭄으로 저수지 물이 말라붙고 저수지 바닥이 거북등처럼 갈라지니 자손들이 마침내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라 생각하고 창과 쇠막대로 저수지 바닥을 파헤쳐가며 갖은 애를 다써보았지만 찾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수 백년 쌓인 한을 풀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난 일을 통감하고 늦은 감은 있으나 이제라도 선영을 위하는 정성에서 재물을 마련하여 선영을 받드는 것이 먼저 해야 할 도리라 생각하고 후손 석윤이 묘비명을 부탁하니 부족한 이 사람이 거절하지 못하고 여러 정황을 참작하여 이와 같이 명하노니 시기를 보아 미리 조처하고 사리가 밝게 처신함이 훌륭한 선비의 행실이요 나아가고 물러남이 뚜렷하니 가히 선비의 행실이라 공의 모든 행실이 옳지 않음이 없음을 증하노라

(원문)
   通訓大夫 平澤縣監 李公 亨樹 墓碣銘
公姓李籍 新平 諱亨樹 麗朝門下侍郞 平章事 諡門間公 諱德明 其始祖也 降九世入 本朝 吏曹判書 諱上垣 弘文館副題學 諡文定公 諱可種 文科正郞 諱貴通 掌樂院 主簿 諱 之華公之 高曾祖考也 ?豊川任氏 成宗辛卯 西紀一四七一年公生于洪州 自?齡聰悟 過人文學 進就器局弘大自云 人而不學何以爲君子 遂決意歸受學 于寒暄堂 金宏弼門 發越才華專事 性理之學 數年之間 文理 大進觀世道 之日燮遂 絶義名 途養德林下採卷以開墉 後學爲 己任律身以 儉接人以恭 溫和之氣縕 於中而著於外不覺 令人起敬非 平日 踐履 之篤豈 能如是乎 自比名播 遠近士林皆景仰 事親以孝 奉仕以誠 晨謁 家廟定省之禮 不懈 宗族之間 朋友之交 相資有無 和睦信義 己任 辛未丁 外艱居盧之哀喪 之備盡 其誠意 服闕後
西紀一五三四年 嘉靖十三年 甲午爲 全羅兵馬節制都尉 翌年轉任 平澤縣監 下車 三載執法 平允卒 吏義理撫民任 恤薄賦化均 成?民蒙 其澤人皆感服稱頌 追思歸鄕 怡養精神 不知塵 外之得失如 公者果幾人呼 仁祖丁未 西紀一五四七年 考終于正寢 享年 七十七 墓 沃溝 翰林洞 亥坐原 配淑夫人 濟州高氏原女事於 舅姑 買餠供具 甘旨不怠 其誠閨門嚴格 親戚和睦 任恤家庭溫和 生二男四女 長諱 仁腹 早卒 次男義復 通訓務安縣監 一女淸州人 承旨韓德三妻 二女潭陽人 田承奎妻 三女杜陵人 杜憲妻 四女文科漢城判尹 慶州人吳震應妻 孫諱春成 文科慶尙都事 吏曹正郞 諱春霖 武科宣傳官 乙卯二月七日卒 墓乾位合? 有碑碣後 亂時 居民中 別名高壯士云者 腕力過人 拔碑投沒 于山下貯水池云 其後 己卯西紀一九三九年適値大早池水枯渴 底龜烈 子孫集會 相謂曰 此天賜之時期也 齊發赴池 或槍 或? 掘鑿探索終 未得遂意 數百年積恨之餘 今?發議 鳩財樹碣墓 僕无新少弛 昔日痛感之恨旦爲 慕先勉後之事也 後孫錫允甫囑 余碣銘而 雖知非人不獲謝 遂按狀而略撰如右又銘曰 見機而作哲人之行 其進其退隨時應變 其何云惟公之謂 如有不信視此謂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