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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날짜 2020-07-21
제목 동국신속 삼강행실도의 몽경 효자도
내용


過孝子李夢慶門 효자 이몽경 집을 지나면서

報恩縣內李孝子 보은고을 안 이 효자를 보소.
旌表雖多孰此如 정려가 많다지만 이 효자에 비하랴
大谷先生有行狀 대곡 선생님이 행장을 지으셨네.
吾今拜手過門閭 나는 지금 배수하고 정려 앞을 지나오.
                                [林白湖集 卷之 三 七言絶句]
 
위의 시를 읽어보면 시 속에 孝子 夢境(몽경), 大谷 成運(대곡 성운)과 作者(작자)인 임백호(林(白湖) 등 세 분이 등장한다.
왜 성운이 몽경의 행장을 지었고 백호의 시 속에 대곡의 이야기가 나올까? 이 세 분은 어떤 관계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대곡 성운(成運, 1497년∼1579년)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시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자는 건숙(健叔), 호는 대곡(大谷)이다.
중종 때 司馬試(사마시) 兩試(양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1545년(명종 즉위) 형 성우(成遇)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입자 관직을 버리고 보은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성운이 처가인 종곡(보은읍 종곡리)에 내려와 처남 되는 김천부와 함께 숨어 살던 작은 기와집으로, 1887년(고종 24)에 후학들이 양현(兩賢)을 사모하여 모현암이라는 현판을 걸고, 후학 양성과 시문, 교육에 전념한다.

위의 시 ‘효자 이몽경문’을 지은 임백호는 대곡 성운의 제자이다.
신평이씨 괴당공파의 14세 玉券(옥권)의 사위 경주인 군수 金天富(김천부)의 아버지 府使(부사) 金眞碧(김진벽)이 성운의 장인이다.
성운이 후사가 없이 죽자 성운의 장인 김진벽의 遺志(유지)로 처남 김천부가 성운의 제사를 챙겨왔고 이후 계속 경주김씨 문중에서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따라서 成運(성운)과 그 제자 林悌(임제), 성운의 처남인 新平李氏家(신평이씨가)의 사위 金天富(김천부), 신평이씨 효자 이몽경은 당시 친교하는 관계였을 수도 있다. 여기에 열거된 모든 인물들은 모두 같은 시대의 보은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다.

 효자공(孝子公)의 세계(世系)는 사재공파(司宰公派) 참군공(參軍公) 승지공계(承旨公系) 15世로 고조는 통훈대부 아산현감을 지낸 지손(智孫) 증조는 승사랑(承仕郞) 현릉참봉(顯陵叅奉) 숭우(崇禹)로 조부는 1498년 진사에 장원하여 중종조에 行義(행의)로 왕자사부(王子師傅)를 拜(배)한 광조(光祖)이고 부친은 진사인 준(遵)이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公의 효행록에는 아래와 같이 公에 대하여 쓰여 있다
.[원본 글 출처: 이몽경의 효행록(孝行錄) 저자: 성운(成運)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41 사자(士者)] 大谷集(대곡집)의 「대인작」2편은 모두 監司에게 올리는 글로 대곡 성운이 邑人 李夢慶의 지극한 효성을, 다른 한 편은 報恩 三年山書院의 儒生들을 대신해서 재주 있고 현명한 邑宰가 부임될 수 있도록 조정에 아뢰어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다.

이 고을에 사는 사람인 이몽경(李夢慶)은 진사(進士) 이준(李遵)의 아들이다. 사람 됨됨이가 근신하고 후덕하여 인자하고 효성스러운 행실이 독실하였다. 아버지 이준이 그 아내와 서로 정이 없어 두 첩을 두고 함께 살면서 아들 이운손(李雲孫)이 태어나자 그 아이만 사랑하고 이몽경을 대우함에 있어 은정(恩情)이 적어서 타인의 자식처럼 보았으나 이몽경은 조금도 섭섭한 생각을 가지지 않고 더욱더 아버지를 사랑하며 나아가 뵐 때는 언제나 기쁜 낯빛을 하였고, 음식을 봉양함에 있어 반드시 그 뜻을 극진히 하였다. 이준이 늙을 나이가 되기 전에 갑자기 병을 얻어 팔과 다리가 불인(不仁)해서 뻣뻣이 누워 일어날 수가 없게 되자, 이몽경이 5년이란 오랜 기간에 병시중을 하면서 근심과 괴로움을 견디며 부축하여 일으키고 누이곤 하였다. 반찬을 만들 때면 반드시 직접 하고 약을 드릴 때도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으며, 잠깐 사이라도 아버지의 곁에 있지 않으면 반드시 크게 걱정하여 집의 사사로움을 끊고 통내(通內)하지 않았다. 일이 비록 꼭 처리해야 될 것이 있더라도 즐겨 가서 보지 않았으므로, 그 아내가 그가 밥을 먹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자기 집에서 불러 밥을 먹게 할 경우 가지 않을 때가 많고 더러 가더라도 반드시 물을 밥에 부어 말아서 먹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자기를 찾을까 걱정되어서 먹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아버지의 얼굴에 두고 있으면서 아버지 병세가 더한가 덜한가를 살폈다. 괴로워서 신음하며 아파하는 소리를 들으면 낯을 돌리고 눈물을 닦았다. 아버지가 수저를 잡을 수 없으므로 이몽경이 안고서 수저로 밥을 조금씩 떠서 입에 넣어 주되 잘못하여 부딪쳐 입술과 혀를 다칠까 두려워서 손을 들 때마다 반드시 조심하였다. 밤이면 의대를 풀고 자지 않았으며 앉아서 무릎을 꿇리지 않았고 덮은 이불을 반드시 정돈하여 몸이 이불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였고 밥을 앞에 가깝게 놓아두고서 권하여 잡수시게 할 것에 대비하였다. 또한 귀를 기울여 아버지의 천식이 빠른가 느린가를 들어보아 편안히 주무시면 기뻐하고 그렇지가 않으면 우려하였다. 비첩(婢妾)이 밤늦도록 시좌하기에 피곤하여 머리를 연하여 누워 자는 것을 보고 아버지의 마음이 허약해서 곁에 시자가 없으면 반드시 스스로 놀라 무서워할까 두렵고, 또 극도로 위태롭고 피곤하여 정신이 흐려지고 깨어나지 못할 경우 불러서 깨울 사람이 없을까 염려하여 등잔에 기름을 더 넣어 등잔불을 켜서 불빛이 더욱 밝게 하고는 날이 밝도록 자지 않았다. 아버지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이 있으면 아무리 산과 바다에서 나는 물건이라도 달려가 사람들에게 요구하여 반드시 얻어서 잡수시도록 해드렸다. 집이 아무리 가난해도 음식을 봉양함에 있어 반드시 아름다운 맛이 있었다. 자기 집의 재산을 다 기울여 소를 사서 포를 만들어 봉양했고 사냥매를 구하여 매를 얻으면 스스로 팔뚝에 앉히고 나가서 꿩과 토끼를 사냥하고, 또 그물로 참새를 잡고 물고기를 잡아서 있는 것으로 없는 것을 이어서 한 번도 떨어짐이 없게 하니, 이웃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서로 앞 다투어 봉양하도록 닭을 가져다 준 것이 전후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봉양한 음식이 아주 새로운 것이 아니면 아버지가 노하여 문득 땅에 내던지고 먹지 않았다. 그러면 이몽경이 얼굴빛을 더욱 온화하게 하여 뜰로 내려가서 그것을 줍고 물러가서 다시 갖춰 올렸다. 날이 갈수록 병세가 더욱 깊어 똥과 오줌이 항상 저절로 나옴을 금하지 못하니, 이몽경이 자기가 직접 치우고 정돈하되 깨끗한 물건을 잡듯이 하였고, 옷과 이불이 더럽혀진 것도 자기가 직접 빨아 시비(侍婢)들에게 맡기지 않았고, 아버지에게는 오줌과 똥을 싼지를 알지 못하게 하였다. 아버지의 병을 잘 치료할 의원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천리도 멀다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도보로 그 집에 찾아가서 문의하니, 의원이 이몽경의 말이 간곡하고 급박하며 안색이 처참하고도 슬픈 기운이 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그가 효자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정밀하게 살펴서 약을 시키기를 다른 사람의 병을 물은 자에 하던 것보다 다르게 하였다. 만약 약이 귀하여 얻을 수가 없으면 무거운 값을 짊어지고 서울로 달려가서 반드시 얻은 뒤에 돌아왔고, 그 약이 효력이 없으면 또 다른 의원을 찾아가서 먼저처럼 하였다. 이에 이르러서야 그 아버지가 감동하여 깨닫고 말하기를, “내가 처음부터 우리 아이의 어짊을 알지 못했으니 이는 아비가 밝지 못해서이다. 나에게 이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죽은 지 오래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슬픔과 기력이 다하여 얼굴빛이 검고 몸도 말랐다. 좋은 나무로 가려서 관을 만들고 수의를 두텁게 만들어 염을 하되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신실하게 하여 조금도 유감이 없게 하였다. 석 달이 되자 선영(先塋)에 장례를 치르고 장사지낸 날에는 반혼(返魂)한 다음 중문 밖에 허름한 방을 가려서 거처하며 3년 동안 내실에 들어가지를 않아서 아내도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슬픔에 북받쳐 통곡하는 소리가 밤낮 끊어지질 않았고, 항상 궤연(几筵) 곁에 있으면서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벗지 않았으며 물러가 처소에서도 그 복식은 그러하였다. 제사에는 그에 맞는 제물을 준비하여 자신이 직접 제찬(祭饌)을 다스렸고 심지어 솥에 불을 때거나 제기를 씻는 것도 모두 스스로 맡아 하여 아무리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라도 수고롭게 여기지 않았으며, 그밖에 다른 선행도 빛나 기록할 만한 것이 있다. 이몽경에게 두 누이동생이 있어 시집을 갔는데, 그들 사람됨이 재물을 숭상하고 이끗(재물의 이익이 되는 실마리)을 좋아하였다. 하루는 이몽경을 보고 재산 나누기를 요구하며 매우 급하게 서두르며 반드시 자신들이 선택하여 가지려 하므로, 이몽경이 안색을 서운하게 가지지 아니하고 온화한 말로 허락하고 말하기를, “비옥한 밭과 젊고 힘센 노비를 그대들 둘이 가져가고 그 나머지는 내게 붙여 두어라.” 하고는 말을 마치자 소매에 손을 넣고 앉아서 그들이 하는 대로 따르니, 두 사람이 비록 탐욕스러우나 그의 말을 듣고는 부끄러워서 감히 다 가져가지는 못하였다. 그의 종형 이희경(李熙慶)의 아내가 돌림병에 죽고 서로 전염되어서 열 명에 한 사람도 낫는 이가 없으므로 친척이 다 두려워 겁을 먹고 감히 그 집에 가까이 가지를 못하였으나 이몽경 만은 홀로 말하기를, “형수가 죽어서 그 시체가 침상에 있는데도 그 시체를 염습해 줄 사람이 없으니 마음에 차마 못할 일이다.” 하고, 마침내 빠른 걸음으로 그 집에 들어가서 예절에 맞도록 염습과 초빈(初殯)을 하였다. 그의 숙부 이근(李近)이 병중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병이 우리 형의 병세보다 심한데 내 아들은 이몽경과 같이 효도하지 못하니 나는 빨리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몽경이 크게 상심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아버지를 잃었으니 아버지로 섬길 분은 유독 숙부 한 어른뿐인데, 지금 돌아가셨으니 나는 마침내 아버지가 없게 되었구나.” 하고, 숙부의 죽음에 곡하기를 친아버지의 죽음에 곡하듯이 하고 초종 장사를 경영하여 다스림에 있어 그 비용이 다 이몽경의 집에서 나왔다. 얼마 못 가서 이근의 아들이 죽었는데, 집이 빈한하여 장사를 치를 수 없게 되자 남에게 관을 빌리고 옷을 벗어 부조를 하고 묘 자리를 잡아 깊이 파고서 시신을 묻어 주었다. 그때에 이몽경이 한창 부친의 상중으로 자기 집 상사도 끝나지 않은 때였으나 그 재력을 다하여 두 사람의 초상을 부조하여 치러 내니, 마을 사람들이 그의 어짊을 매우 칭송하였다. 이몽경이 5년 동안 부친의 병을 치료하고 3년간 거상을 하였고, 또 그 사이에 숙부와 종제의 상사를 거듭 당하자 마음이 꺾이고 뼈가 상하여 골수의 병이 들어서 부친의 복을 벗기 한 달 전에 죽었다. 임종시에 매부(妹夫)들에게 말하기를, “이운손(李雲孫)은 아버지가 사랑하던 아이이므로 내가 항상 불쌍하게 생각해왔기에 잊을 수가 없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아버지가 손수 준 것이니, 내가 죽은 뒤에 그것을 빼앗아서 그로 하여금 생업을 잃게 하지 말기를 바란다. 반드시 빼앗으려고 한다면 차라리 내 재산을 가져다 보탤 것이요, 이운손의 것은 빼앗지 말라.” 하였다. 이몽경은 유년기에 배움을 잃어버려서 문자를 알지 못하고 또 부형의 가르침과 인도해 주는 힘도 없이 농촌 밭두둑 사이에 거주하면서 하는 것이라곤 농사짓는 일뿐이었는데, 그가 행한 선행은 아무리 옛사람이라도 미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는 이 사람이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 후하여 양성(良性)에서 발현된 것이지 가르침으로 인해 선한 것이 아님을 알겠으니, 더욱 귀하다 하겠다. 생존에 이미 위선(爲善)한 보답을 받지 못했는데, 죽은 뒤에도 없어져서 이름이 후세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찌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우리들이 한 고을에 살면서 귀로 들은 것과 눈으로 본 것이 이와 같은 데도 드러내어 드날려 주지 않는다면 이는 남의 선행을 없어지게 하는 일이므로 군자의 비웃음을 받을 것이다. 삼가 효행의 약간 조항을 기록하여 범함을 무릅쓰고 보고하오니, 감사에게 진달 보고하여 그로 인하여 임금께 알려 주신다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발췌 /이달영 저/ 신평이씨인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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