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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달영 날짜 2020-08-29
제목 괴당공은 과연 암행어사였나?
내용
槐堂公派 派祖(괴당공파 파조)인 槐堂(괴당) 李公(이공) 天啓(천계)의 七代孫(7대손) 雲漢(운한)이 쓴 槐堂公(괴당공)의 遺事(유사)에 《…陞舍人以御史巡嶺南郡邑肅然…》이라는 귀절이 보인다.
즉 《舍人(사인)으로 승진하여 御史(어사)가 되어 嶺南(영남)을 巡行(순행)하니 郡邑(군읍)이 肅然(숙연)하였다》라는 뜻이다.
舍人(사인)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관직이다. ‘舍人(사인, 정4품)’은 정원이 2인으로, 하위의 검상(檢詳, 정5품)과 사록(司錄, 정8품)을 지휘하면서 실무를 총괄하고, 중요 국사에 왕명을 받아 삼의정(三議政)의 의견을 수합하고 삼의정 또는 의정부당상의 뜻을 받들어 국왕에게 아뢰는 등 국왕과 의정부의 사이에서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였다. 의정부 기능 및 국왕과 의정부대신 간의 구실이 중시되어 재직 기간이 만료되면 승천(陞遷)되었다.
춘추관의 수찬관(修撰官) 이하 직을 당연직으로 겸임했고, 상피(相避 : 친족 또는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같은 곳에서 벼슬하는 것을 피하게 함) 규정에 적용되었다.

御使(어사)란 조선시대 중앙에서 특별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하던 사신으로 당하관으로 임명할 때는 '御史', 당상관을 임명하면 '御使'라고 표기했다.

○ 필자가 어려서 집에 전해오는 世系(세계)가 있었는데 얼핏 그 속에 괴당공이 賑恤御使(진휼어사)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중학교 때의 일이라서 50년이 넘었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세계가 유실되어 지금 확인할 수 없다.

○괴당공의 어사 관련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조선시대 ‘어사명단’등 여러 史書(사서)를 뒤졌으나 괴당공이 어사를 지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면 행장에 등장하는 공의 어사관련사항은 허위기록인가?

○ 괴당공은 경상도사를 지내신 사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1543年(中宗 39년) 慶尙道(경상도) 都事(도사)가 되어 경상관찰사 李彦迪(이언적)과 交遊(교유)하고 1544년 4월 22일(中宗 39)에는 사헌부 지평으로 중앙 정계로 돌아오다. [道先生案에는 兼觀察使 資憲大夫 知中樞府事 兵馬水軍節度使 李彦迪 癸卯八月十七日 右參贊來 甲辰五月初八日散 都事 承訓郞 李天啓(癸卯五月十一日 司書來甲辰四月二十七日 持平去]

○ 그런데 어사명단에도 없는 괴당공이 행장에는 왜 어사로 영남을 순행하였다고 나와 있는가? 영남이란 지금의 부산광역시·대구광역시·경상남도·경상북도 지방을 포함한다.
다음백과사전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도사는 각 도(道)의 경력·도사와 중앙 관청에 두어진 5·6품의 남행(南行)을 수령관이라 지칭하였다.
각도의 外官(외관)으로서 經歷(경력)과 함께 首領官(수령관)으로 통칭되면서 관찰사(觀察使)를 보좌하였다.
또 세종 때 경력이 혁파됨으로써 도사만 남게되었다.
감사가 자리를 비웠을 때는 임무를 대행하고, 감사와 지역을 나누어 도내를 순시했다.
감사가 수령을 포폄할 때는 도사와 상의했으며, 향시·교생고강(校生考講) 등을 감독하고, 관리를 규찰하는 등 감사의 업무를 나누어 수행했다.
다른 지방관으로 하여금 도사를 가벼이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였다.
이 때문에 도사를 '아감사'(亞監司) 또는 '아사'(亞使)라고도 부르며, 감사 못지 않은 비중을 두어 문신을 선임하는 청환직(淸宦職)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도사는 암행감찰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규찰 기능을 수행하면서 필요에 따라 신분을 숨기고 암행감찰에 나서기도 하였다.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는 敬差官이나 御使의 임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중앙에서는 사정 상 경차관이나 어사의 파견이 부적절하다고 판단될 때 에는 도사로 하여금 그 기능을 대신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는 중앙정부에서 도사에게 맡기는 특수한 기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차관은 국가의 재정, 사법, 민생 등의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하는 奉命官員으로 지방에서 여러 분야에 걸쳐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중앙정부에서 주로 도사에게 대행시킨 경차관 직무는 미곡의 損實踏驗이었다.[김순남,〈朝鮮初期 敬差官과 外官〉,《韓國史學報》18, 고려사학회, 2004, 335~336쪽.]

필자는 이상의 결과로 짐작하건데 공은 경상도사로서 어사의 임무를 대행하였고, 그로 인하여 행장에 그러한 표현이 들어간 것으로 판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