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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달영 날짜 2019-10-25
제목 雙梅堂의 最高官職에 대한 考察
내용

사진은 대전 뿌리공원의 신평이씨 조형물의 일부이다.
여기에는 쌍매당이 지은 한수의 시와 그분의 이력이 나와있다.
그분의 이력 중에 "贈議政府贊成事(증의정부찬성사)"란 내용이 있다.
즉 쌍매당이 '의정부찬성사를 증직'받았다는 내용이다.

贈職(증직)이란 '국가에 공로가 있는 관인, 현달한 관인, 효행이 뛰어난 인물 등이 죽은 뒤에 관직이나 관계를 받거나 죽기 전에 받은 그것보다 높게 받는 인사제도'이다.
돌아가신 뒤에 받는 관직이다.

왕조실록에는 지의정부사가 卒한 때의 관직으로 나와있다.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3월 30일 을축 2번째기사 1405년 명 영락(永樂) 3년】
知議政府事李詹卒。 詹, 洪州人, 字中叔, 自號雙梅堂, 贈參贊議政府事熙祥之子。 至正乙巳, 中監試第二人。 戊申, 恭愍王幸九齋, 以經義試諸生, 命李穡讀卷, 中者七人, 詹爲第一,.....

쌍매당의 최고 관직이 지의정부사냐  찬성이냐에 대한 사실이 면확하지 않고, 현재까지는 《왕조실록》의 쌍매당의 졸기를 기준으로 지의정부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15년 종사연구실에 의하여 문제가 제기되었다.
쌍매당의 최고관직이 贊成(찬성)이었다는 것은
增補文獻備考(증보문헌비고) 직관고(職官考) 좌우찬성선생시호록》,
《청선고(淸選考) 이상(貳相)선생안》,
허균의 《태각지(台閣志序)》 등
[이상 新平李氏上系傳p407,409李秉浩]에,

또 필자가 확인한 자료인
許穆(허목)의 《미수기언(眉叟記言)별집 권8 의정부동서벽제명안 서(議政府東西壁題名案序)》 등에 나와 있다.
(淸州金氏大同譜(2017 丁酉譜)의 ‘諡號錄一覽表(시호록일람표)’에도 쌍매당의 관직은 贊成(찬성)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이 시호록 일람표도 증보문헌비고 등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허목의 미수기언에 의하면
【우리 태조가 당초에 도평의사(都評議司)를 설치해서 나라 다스리는 일을 관장하게 하고 삼군부(三軍府)를 세워서 병사(兵事)를 다스렸다. 국가를 처음 안정하였으므로 대개 고려의 옛 제도를 따른 것이었다. 그 후 우리 공정대왕(恭靖大王 태종) 때에 두 부를 고쳐서 의정부로 만들고 좌의정ㆍ우의정을 두어서 정1품으로 하고, 그 다음 시랑(侍郞)ㆍ찬성(贊成)이 종1품이고, 또 그 다음 참찬이 정2품이었다. 그 후 영의정을 더 두어서 삼공(三公)으로 만들면서 시랑을 없애고 좌ㆍ우 찬성과 좌우참찬은 그대로 두었다. 14년에 다시 영부사(領府事) 1인, 판부사(判府事) 2인을 두었는데 모두 정1품이고, 동판부사(同判府事) 2인은 종1품이었는데 얼마 안 되어서 없애고 다시 옛날 관직대로 회복하였다. 찬성은 이첨(李詹)ㆍ유탁(柳濯)으로부터 시작되고 참찬은 이래(李來)ㆍ권근(權近)으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3백 년을 내려오고 있다. 그동안 어질고 재능이 있어, 벼슬에 있으면서 이름이 드러나 문적에 실린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그런데 중엽 이래로 국가에 사변(事變)이 많아서 전적(典籍)이 모두 없어졌고, 오직 의정 삼공만이 여러 전임(前任)의 옛 문안(文案)이 있다. 그러나 찬성ㆍ참찬은 갖추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동부(東府)에는 간직된 문서가 없으니, 대개 없어져서 전해 오지 못한 것이다. …】

<허목의 《미수기언》별집 의정부동서벽제명안(議政府東西壁題名案)序 중 쌍매당의 贊成부분> 의 내용 중 ‘공정대왕때 두 부를 고쳐서 의정부로 만들고 좌의정, 우의정을 두어서 정 1품으로 하고, 그 다음 시랑(侍郞), 찬성(贊成)이 종1품이고, 또 그 다음 참찬이 정2품이었다.’란 내용의 의미는 官制改革(관제개혁)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관제개혁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고 쌍매당이 찬성에 제수된 시기를 추측해 본다.

1차 관제개혁은 1400년(정종 2년) 4월에 태종이 주도하여 단행되었는데, 이는 권력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한 곳에 집중되자, 권력 분권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를 만들었으며, 중추원의 왕명출납 기능은 승정원을 신설하여 국왕의 비서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왕조실록》정종 4권, 1400년 4월 6일 10번째 기사]

2차 관제개혁은 1401년(태종 원년) 7월에 단행되었는데 문하부를 폐지하여 서정(庶政)을 관장하던 재상(宰相)만 의정부에 이관하고, 문하부의 간쟁 기능은 사간원을 신설하여 담당케 하였다. 또 글 짓는 기능은 예문관, 국사(國事)기록 기능은 춘추관으로 하여금 담당케 하였으며, 의흥삼군부를 승추부로 개칭하여 승추부는 곧 승정원과 중추원을 합한 기관이 되었다. [《왕조실록》1401년 7월 13일 1번째 기사, 2번째 기사]

3차 관제개혁은 1414년(태종 14년)에 단행되었는데 이때는 이미 쌍매당이 卒(졸)한 뒤이라서 쌍매당과는 관련이 없다.

쌍매당은 2차 관제개혁에 직접 참여하여 관제를 개정하였다는 《왕조실록》의 기록이 있다. [《왕조실록》 1401년(태종 1년) 6월 16일(계유) 영삼사사(領三司事) 하륜(河崙)· 참찬(參贊) 권근(權近)· 첨서(簽書) 이첨(李詹)에게 명하여 관제(官制)를 개정하였다.] 

찬성에 오른 기록 중 년도가 표기된 것은 《청선고(淸選考)》에 1402년 임오(壬午)에 쌍매당이 찬성에 제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402년은 쌍매당이 조선조에 들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시기이다.
하륜과 함께 명나라에서 인장과 고명을 받아와 태종은 公을 칭찬하는 교서와 전토 60결과 노비 6구를 상(賞)으로 내렸다.
관직의 이동도 많았던 터라 이 기간에 찬성에 제수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따라서 청선고의 기록에 1402년 쌍매당이 찬성에 올랐다면 그것은 증직이 아니다.
당시에 쌍매당은 생존해 계셨던 것이다.

앞서 증직에 관하여 언급하였던
-죽은 뒤에 관직이나 관계를 받거나 죽기 전에 받은 그것보다 높게 받는 인사제도'이다. 돌아가신 뒤에 받는 관직이다.-는 것은
살아계실때 증직은 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허목의 미수기언의 내용에서  "찬성은 이첨(李詹)ㆍ유탁(柳濯)으로부터 시작되고 참찬은 ..."이란 내용은 실직이라는 것이다.
증직을 "찬성은 이첨(李詹)ㆍ유탁(柳濯)으로부터 시작되고 참찬은 ..."내용으로 기록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쌍매당의 관직을 찬성으로 표기한 史書(사서)들은 대부분 官撰(관찬:관에서 왕명 또는 신하의 주청에 의하여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의 관리가 나누어 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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